- 등록일2026.04.28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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소위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운동은
▶ 가톨릭교회의 대사(大赦) 문제로 말미암은 루터의 등장으로 발단이 되었고,
▶ 예수님이 사도들을 통해 세우신 가톨릭교회가 분열하는 단초를 제공하였습니다.
루터의 종교개혁 발단 및 및 전개 과정, 결과 등은 다음과 같습니다.
1. 루터의 탄생 및 수학
•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 작센의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습니다.
• 열네 살 때 마그데부르크에 입학하여 2년 후에는 다시 아이제나흐에 입학하여 졸업하고,
• 열여덟 살에는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과 법학을 연구하고 스무 살에 학위를 받았습니다.
2. 루터의 수도회 입회
• 루터는 1505년 교외에서 산책을 하면서 얼마 전 죽은 친구를 회상하면서 현세의 무상함을 절감하고 있을 즈음,
• 폭우가 쏟아지면서 벼락이 치는 바람에 옆에 있던 또 한 명의 친구가 졸지에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.
• 가톨릭 신자였던 루터는 황급한 나머지 성녀 안나(마리아의 어머니)를 부르며 목숨을 구해주면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하겠다고 맹세하게 됩니다.
• 기도 후 살게 된 루터는 약 2주간의 준비를 마친 후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들어가 2년의 수련 기간을 거쳐
• 1507년 청빈, 정결(평생 독신), 순명(장상의 명령에 복종)의 삼대 서원을 하느님께 바치고 수도신부가 되었습니다.
3. 루터의 초기 신학
• 루터는 1508년 비텐베르크 대학 철학 교수로 임명되었고, 1512년에는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.
• 그 후로는 시편, 로마서, 갈라티아서, 히브리서, 티토서 등을 강의하였습니다.
• 마르틴 루터는 그가 수사였을 때부터 어떻게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지에 대해 초조해하며 두려워했습니다.
• 그가 교육받은 오컴주의 신학은 하느님께서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하시며,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느님의 법을 완성하고 영복을 얻기에 충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.
• 하나님의 절대적 자유와 신앙의 독립성을 강조한 신학, 그러나 마르틴 루터 수사는 이 교의가 자신의 체험과 조화되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.
• 그는 자기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욕정을 극복할 수 없다고 느꼈고 그 자신의 행업으로는 자신이 열망하는 구원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느꼈던 것입니다.
•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의 “신앙으로 의로운 이는 살리라”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토록 초조하던 마음에서 탈출구를 찾았습니다.
• 그는 자비로운 하느님이 신앙을 통해 사람을 의롭다 하시며(의탁하는 믿음) 이 원칙을 토대로 모든 성경이 새 의미를 지닌다고 여겼습니다.
• 그때부터 루터는 신학을 강의하며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신학을 마음속에 세우게 됩니다.
① “사람은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지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.”
② “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부패 되었으므로 자유의지는 없다.”
4. 가톨릭교회의 대사령 선포
•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.
“네가 무었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있을 것이며,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.” (마태 16.19) |
• 위 성경 말씀으로 예수님은 신자들이 하늘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장애들을 없앨 권한을 교회에 주셨습니다.
• 이것이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는 “대사권”입니다.
• 하늘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장애로는 죄와 죄로 인한 잠벌인데
• 죄는 하느님께 고해성사를 보고 고해 집전 신부가 사죄경으로 죄를 용서해줌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지만,
• 죄로 인한 잠벌은 반드시 고행과 선행, 기도 등 합당한 보속의 방법으로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.
• 그런데 이 합당한 방법에 선행이 들어가 있으며 이 선행에 교회를 위해 재산을 희사하는 행위도 당시에 포함되는 것으로 교회가 인정하였고
• 이를 일정한 시기에 교회의 권한으로 신자에게 교회가 정해준 방식의 잠벌을 없애주는 ‘면벌 행위’를 하면 잠벌을 용서해주는 일종의 보속 실천 기간과 방법이 있는데
• 이러한 것을 발표하는 것을 “대사령 선포”라 합니다.
5. 가톨릭교회의 대사령 선포에 항의 논문 공포
• 루터는 자신의 신학을 세상에 공포할 기회를 찾다가 독일 국내의 가톨릭교회의 대사령 선포 선고위원의 임명에 불만을 품고
• 1517년 10월 31일 95개 조로 된 논문을 베덴베르크 성당 문에 붙이게 됩니다.
• 이와 같이 종교개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이 대사령 선포 사건이 발단이 되기는 하였지만
• 교회의 대사령 포고 때 자신과 사이가 나쁜 도미니코 수도회 테첼 신부가 임명된 데 대한 실망감과 시기심으로 불만을 표출하고
• 그에 반항하기 위하여 베덴베르크 성당 문에 95개 조항으로 된 논문을 붙였던 것입니다.
• 이와 같은 논문 게시 방법은 당시 신학자들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때 쓰던 한 가지 방법으로 관례가 되어 있던 방법입니다.
• 대사령의 내용은 다른 선행과 고행, 기도에 더하여 베드로 대성전을 짓는데 필요한 기금을 내는 신자에게 합당한 보속 행위를 했으니 교구에서는 이를 증서로 확인하라고 발행한 것이 “대사 증서”인데
• 엄밀히 말하면 “면죄부”가 아니라 “면벌부”로 잠벌을 보속하였다는 증서인 것입니다.
• 이를 루터는 “면죄부”로 주장하여 교회에 불만이 있는 신자들을 루터의 종교개혁 명분에 동참하게 한 것입니다.
• 이에 질세라 테첼도 106개 조항의 반박 논문을 성당 문에 붙이고 루터에게 대항하여 소위 대사 논쟁이 불붙게 되었습니다.
6.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
• 이후 여러 논쟁을 거친 후 교회에서는 레오 10세 교황이 카예타누스 추기경을 루터에게 보내어 사실을 조사하고 루터의 그릇된 의견을 바로잡도록 명령하였습니다.
• 그다음에는 독일인 밀티츠를 보내어 루터의 반성을 요구하였으나, 그는 끝까지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.
•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태는 악화일로를 걷게 되고, 1520년 6월 15일 교황 레오 10세는 드디어 ‘엑수르제(Exsurge)’라는 교서를 내려,
•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밝혀 설명한 뒤 60일 안에 반성하기를 루터에게 요구하였으나
• 루터는 같은 해 12월 10일 교황의 교서를 사람들 앞에서 불살라 버림으로써 다음 해인 1521년 1월 3일 교회에서 파문당하게 됩니다.
7. 루터 신학의 확산
• 루터는 이 신학을 단 한 번에 체계화한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이를 발전시켰고,
• 점점 더 대담하게 가톨릭 정통성에서 멀어져 갔고 확산되었습니다.
• 그가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앞서 말했던 여러 호의적 환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며,
• 다른 직접적인 요인들도 많이 있는데, 무엇보다 루터는 비범한 성격의 소유자였고, 여러 모순된 모습도 많지만 군중을 깊이 감동시키는 설교 능력을 지녔다는 것입니다.
•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목적에서 루터의 가르침을 수용했습니다.
• 성직자의 윤리 수준이 매우 낮았던 시기에 그의 독신 철폐 주장은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.
• 열성이 식었던 많은 수도승과 수녀들에게 수도 서원 폐지 주장은 자유의 종소리처럼 들렸던 것입니다.
• 그가 주장한 ‘위로의 신학’, 즉 행업이 아닌 믿음이 의화(칭의)를 가져온다는 주장은 그리스도교인의 생활을 더 편안하게 했고
• 자기 죄를 인식하면서도 종교심을 간직하며 영혼 구원을 열망했던 이들의 마음을 진정시켰던 것입니다.
8. 소위 종교개혁의 시작
• 이 대사 논쟁은 소위 종교개혁으로까지 치닫게 되는데 루터는 카톨릭교회의 교황을 배척하고,
•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제외한 다른 성사는 파기하고,
• 아래와 같은 본인의 ‘삼대 원리’를 역설해 나갔습니다.
①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부패되었으므로 자유의지가 없다.
②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받는 것이고, 인간의 선행이나 고행 등으로 얻는 것은 아니다.
③ 신앙의 규범은 성경뿐이다.
9. 루터의 가톨릭교회 비판과 대립
(1) 루터의 가톨릭교회 비판
• 교황청이 그를 파문하자 루터는 3개의 저서(그리스도교의 개혁에 관해 독일 귀족들에게 고함, 교회의 바빌론 유폐에 대하여,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)를 통해서 드디어 교황과 교회를 마구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.
• 루터는 이제 공공연하게 교황을 ‘반(反) 그리스도’요 ‘그리스도의 원수’라고 비판했으며,
• 가톨릭교회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악마의 제도라고 격렬하게 공격했습니다.
•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으로부터 루터 자신이 세운 신학(위로의 신학)을 더 발전시켜
• 이 ‘자비의 의화 신학’을 기초로 가톨릭교회 전통과 공개적으로 상충되는 교의 체계를 세워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.
① 인간 본성이 죄로 완전히 타락됐다.
② 의화는 인간이 믿고 내맡기는 믿음에서 생겨난다.
③ 의화는 인간이 내적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로로 인간에게 무상으로 주시는 것이다.
④ 인간의 행업은 제 구원에 아무 소용이 없다.
⑤ 직무 사제직은 존재 이유가 없으며 대부분의 성사들과 수도 서원도 마찬가지이며,
⑥ 특히 교황직은 적그리스도가 만든 최악의 제도이다.
⑦ 교회를 순전히 내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여 특히 교회법과 같은 교회 내의 어떤 제도적 측면도 거부한다.
⑧ 따라서 교회는 계시를 홀로 보유하지 않으며 그 해석자도 아니다.
⑨ ‘오직 성경’이 유일한 계시의 원천이다.
⑩ 각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영감을 받아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.
(2) 독일 국민의 영웅으로 등장
• 루터는 오래전부터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던 사람들, 특별히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의 불만을 대변하는 자로 자처하면서 로마를 거스르는 독일 국민의 영웅으로 등장했습니다.
• 물론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루터의 개혁 프로그램이 윌리엄 오컴의 유명론에 근거한 새로운 신학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.
(3) 독일 귀족의 루터 보호
• 로마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루터를 보호한 사람은 독일 귀족 프리드리히였습니다.
• 프리드리히는 루터가 로마로 소환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었고,
• 로마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후에는 자기 기사들을 보내어 루터를 수개월 간 자기 구역 내에 안전하게 있도록 보호해 주었습니다.
(4)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 및 가톨릭교회 성사, 제도 비판
• 루터는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는데(1521년), 뛰어난 문장력과 루터의 명성 덕분에 독일 전역에 널리 읽혀졌습니다.
• 또한 루터는 소책자들을 써서 가톨릭교회를 비방하였습니다.
• 예를 들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대단히 거룩했던 것들,
• 예를 들면 미사성제, 사제직, 수도자 신분, 독신제, 교황직을 모독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.
• 또한 그 당시에 새로운 인쇄술이 개발되어 루터의 저서는 더욱더 일반 대중을 중독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.
(5) 수도원 수도자에게도 영향
• 루터의 이런 독소는 수도원 안에도 침입하였습니다.
• 그 일례로, 1522년 1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총회는 수도자들에게 원하면 얼마든지 수도원을 떠날 수 있도록 허락했고,
• 이때부터 무수히 많은 수도자들이 수도원을 떠났고, 아예 문을 닫는 수도원도 허다하였습니다.
• 물론 몇몇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끝까지 수도원을 지킨 훌륭한 경우도 있지만,
• 그 당시 독일에서 성소 없이 다만 의무적으로 수도생활을 하던 수도자들은 모두 떠나가는 상황이었습니다.
(6) 가톨릭교회 재산의 강탈 사건
• 1521년에는 비텐베르그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본당 신부들이 습격을 당하는 폭동이 일어났고,
• 독일제국의 기사들은 트리어의 대주교를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.
• 기사들은 주교관을 습격한 이유를 하느님의 말씀을 개방시키기 위함이라고 표방했으나
• 사실은 루터가 내세운 새로운 교리를 방패삼아 교회 재산을 빼앗기 위함이었습니다.
(7) 독일의 농민전쟁
• 한편 사회적인 불안은 더욱 커져서 급기야 1524년에는 독일 농민전쟁이 일어났습니다.
• 농민전쟁은 루터의 저서에 자극받아 시작되었는데 루터는 처음에는 농민 편을 들다가 나중에는 농민들을 학살하라고 귀족들을 충동질하였습니다.
• 루터는 군인들에게 이렇게 선동했습니다. “할 수 있는 만큼 찌르고 쳐부수고 매달아라. 죽은 채 매달아 놓아라.”
• 결국 농민전쟁은 농민들의 전멸로 끝나고 말았습니다.
(8) 종교개혁은 민중에서 귀족들에게로
• 이 농민전쟁을 계기로 루터의 종교개혁은 민중을 떠나서 귀족들에게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고,
• 귀족들은 루터를 이용하여 자기네들의 이익을 챙기게 되었습니다.
• 다시 말해서 루터교를 택하면 자기 지역 내에 있는 가톨릭교회와 수도원의 모든 재산을 몰수해서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계산으로 루터교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.
• ‘영주의 종교는 그 지역의 종교(Cujus regio, ejus religio)’라는 원칙에 따라, 일단 그 지방의 영주가 루터교를 선택하면 백성들은 무조건 루터교를 따라가야 했습니다.
• 이로써 루터가 그렇게 주장하던 영신적인 교회는 포기되었고,
• 그 대신 아주 폐쇄적인 제도교회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.
• 이제는 귀족들이 교회를 좌우하고 교회의 권력을 행사하는 시기로 접어들었던 것입니다.
8. 카테리나 수녀와 결혼 및 교회의 분열
• 그리고 1525년 6월 13일 하느님께 드린 공식 정결 서원을 깨뜨리고 수도자의 몸으로 26세의 젊은 수녀 카테리나와 결혼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.
• 이때 루터의 동지였던 에라스므스는 이것을 보고 “비극 같은 개혁 운동은 희극(결혼)으로 끝났다.”라고 조롱하셨습니다.
• 이후 루터주의는 불길처럼 퍼져 가톨릭교회와의 분열은 그 절정 단계에 이르렀습니다.
9. 루터의 사망과 개혁교회의 분열 가속
• 루터는 그 후 20년 동지와 제자들의 끊임없는 분쟁을 지켜보면서 1546년 6월 28일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.
• 이후 루터교회로부터 시작된 개신교회는
• 개혁교회(스위스 츠빙글리, 칼뱅의 장로교),
• 성공회(영국국교회)
• 청교도
• 청교도의 미국 이주
• 감리교
• 성결교
• 안식교
• 침례교 등으로 분열이 가속화되어 현재에 이르게 됩니다.
<김영식 신부 저, ‘간추린 가톨릭 교회사’, 제임스 기본스 추기경 저, ‘교부들의 신앙’, 이중섭 신부 저, ‘신자 재교육을 위한 5분 교리’ 참조>
아래 ‘네이버 지식인’ 링크로 들어가면 '루터의 종교개혁'과 관련한 다양한 질문들이 있습니다.
- https://kin.naver.com/search/list.naver?query=%EB%A3%A8%ED%84%B0+%EC%A…
- https://kin.naver.com/search/list.naver?query=%EC%A2%85%EA%B5%90%EA%B0…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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